1. 작품 소개

“화화. 이야기꽃…….”

세 살 때 죽었다 살아난 뒤 대한민국 표준으로 정말 평범하게 살아온 김양이.

어렵사리 취직한 그녀의 첫 직장은 바로 이세계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간, 화화(話花).

이상한 일만 가득한 그곳에서 치명적 매력을 가진 사장님 도는 그녀를 ‘보호’ 해준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자꾸 다가오는데…….

“속은 기분이에요.”

“왜? 왜 속은 기분이야? 설마 나한테 속았다는 뜻이야?”

“네에. 억울해요. 저도 연애에 로망이 있었다고요.”

“응? 내가 뭔가 실수했어?”

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이를 들어 안았다. 양이와 거리를 벌리고 그 안색을 살폈다. 도가 자상히 바라봐주자 양이는 지금껏 생각지도 못했던 갖은 서러움이 치밀었다.

2. 작가 소개

이재온

행복해지는 이야기,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http://blog.naver.com/kindkit

3. 차례

#34. 도깨비 왕, 대 폭주

#35. 그 꿈이 말하는 것

#36. 설야(雪夜)의 짐승

#37. 해가 뜨지 않는 세계

#38. 얼음 도시 암바게스

#39. 혼야(昏夜): 어둡고 깊은 밤

#40. 야수의 날

#41. 찬란한 거짓

#미주

4. 미리 보기

월주, 크닙, 수산은 물개처럼 손뼉 쳤다. 호랑이 모습을 한 백진은 꼬리를 이리 탁, 저리 탁, 부지런히 팔락였다.

“와아.”

양이는 도에게 안겨 있었다.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갈채를 보냈다.

도는 흡족한 낯이었다. 근래 부단히 양이 눈치를 보았다. 당사자가 사귈 마음도 없다는데 부인으로 삼겠다 하지 않았는가. 실은 자존심도 상하고 미안도 하고 눈치도 보였다.

양이야 어떻게 느낄지 몰라도 제 딴엔 요새 어지간히 참았다. 야구장에 다녀오기 전과 비교하면 끌어안는 일도 주물럭대는 일도 입 맞추는 일도 반밖에 하지 않았다.

한데 양이가 인형극에 홀딱 빠져들었다. 기회였다. 도는 홀에 모인 사람과 도깨비, 신수 가운데 유일하게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다. 무대에 정신 팔린 양이를 마음껏 조몰락대고 잘근대고 쪽쪽댔다. 만족감이 차올랐다. 입가가 풀렸다. 남의 여인에게 멋대로 영취를 묻혀둔 영감이지만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게 재미있어? 어린애 같아.”

천진하게 몰두하는 표정은 또 어찌나 예쁜지! 도는 제 목을 쭉 빼서 양이를 요리 보고 조리 보았다. 참지 못하고 뺨에 ‘쪽!’ 입술로 도장을 찍었다.

‘내 거야. 내 거고 말고.’

쪽쪽.

“어?”

그러다 양이의 왼뺨 위에서 입술을 멈췄다. 그 입술을 살짝 떼고 팔을 들어 양이의 오른뺨을 매만졌다.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 아파?”

“네? 괜찮은데요?”

양이는 그때까지도 박수를 쳤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끄러미 도를 보았다.

“왜요?”

“너, 식은땀이 나.”

도는 곱게 뻗은 눈썹을 기우뚱했다.

“인제 보니 조금 창백한데? 진짜 괜찮아?”

어른대던 색과 그림자 탓에 막이 내리고서야 본 안색이 보였다. 도는 낯을 흐렸다. 이마를 기울였다. 양이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열은 없는데…….”

도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걱정스레 자신만을 향하자 양이는 멀쩡하다가도 열이 오를 판이었다. 화끈. 귀 끝까지 빨개졌다. 제 입술을 간질이는 도의 숨결을 피해 얼굴과 목, 어깨를 옆으로 빼고 잔뜩 움츠렸다.

“괜, 찮아요. 저어, 그냥, 읏, 요새 잠을 설쳤더니 어지럽네요. 제 친구들도 빈혈은 흔하고, 별일 아니에요. 괜찮아요.”

“못 잤어?”

도는 몸을 빼는 양이를 슬쩍 당겼다. 적잖이 놀라며 물었다.

“조금…….”

양이는 웅얼댔다. 실은 잠을 설친 지 오래였다. 불면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턱이야 아니었다. 하나 언제 어디서나 머리만 대면 잘 자던 예전에 비하면 더디 잠들고 쉬이 깼다. 꿀잠을 막는 요소가 여럿이었다.

도가 양이에겐 위험스러운 부위를 쑥쑥 키운 이후로 양이는 도에게 안겨 잠드는 일에 예전보다 시간이 들게 되었다.

‘고자가 아니라니, 고자가 아니라니, 고자가 아니라니!’

양이는 종종 절규했다. 잠만 잘 자는 자칭 불면증 환자 도를 의식하다가 또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결국 남편 될 것 같은데 고자가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이야.’

양이는 근본이 안일했다. 고뇌가 드물고 짧았다. 대체로 금세 잘 잤다. 다만 그러다 퍼뜩퍼뜩 깼다. 도가 곧잘 악몽을 꾸어서였다. 도는 자주 뒤척이고 신음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때로 흐느꼈다.

양이가 일어나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면 이내 진정했다. 그러나 양이가 잠에 취해 해롱대느라 내버려두면 마냥 섧고 험한 꿈을 헤맸다. 그 탓에 양이는 요새 언제든지 일어날 태세로 귀 한쪽을 열고 잠들었다.

잠을 방해하는 요소는 또 있었다. 양이는 예전보다 얕게 잠을 자서인지 자꾸 꿈을 꾸었다. 사는 환경과 듣는 이야기 탓인지 꿈에는 도깨비가 노닐고 도깨비 나라가 펼쳐졌다.

도가 종종 잠결에 부르던 당혜 공주도 곧잘 꿈에 들었다. 지난밤에도 당혜 공주를 꿈꿨다. 꿈에서 당혜 공주가 되어 오만 곳을 쏘다녔다. 주로 언니들에게 어른의 비법과 비방을 캐고 다녔다. 도를 쫓아다니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하, 혜도 여인이어요!』

당혜가 된 양이는 급기야 도를 덮쳤다. 공중을 붕 날아 엄청난 하중으로 도를 찍어 눌렀다. 도의 가슴팍을 찢듯이 풀어헤쳤다.

“왜 못 잤어?”

양이가 지난밤 꿈을 돌이키는데 도가 걱정스레 질문을 이었다.

“진짜 어디 불편해? 아파?”

도는 아예 양이를 돌려 안았다. 제 앞에 바짝 내려놓고 요리조리 살폈다. 슬퍼 보일 만큼 풀이 죽었다.

“아니, 그게…….”

양이는 점차 뺨이 붉어졌다. 갈수록 입이 붙었다. ‘사장님을 덮치는 꿈을 꾸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할 수야 없잖은가.

“아니, 그렇게 못 잔달 정도는 아니고, 좀……. 어휴…….”

양이는 도가 보내는 진득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심장이 설핏 지끈댔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 숙였다. 자신에게 점점 붙는 도의 가슴을 팔을 들어 밀었다. 농담조로 뱉었다.

“아니 그냥, 사장님이 잘생기셔서요. 어색해서 그래요. 곧 적응하겠죠.”

“뭐? 하……!”

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심각하던 입매가 휙 풀어졌다.

“설레서 못 잤어?”

“아니, 뭐…….”

양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말실수했다!’

양이는 혀를 깨물었다. 이 능글거리는 남자에게 내가 지금 대체 무슨 빌미를 주었나 싶었다.

“아니, 그게…….”

“진짜야? 나 때문에 설레?”

양이는 도가 느물거리며, 혹은 살살 웃으며 자신을 놀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유들유들 간지러운 미소 대신 온몸으로, 얼굴을 이루는 온갖 크고 작은 요소요소로 꽃봉오리를 터트리듯 웃었다.

어쩌면 양이보다 더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팔을 뻗었다. 양이를 휙 돌려 다시 제 무릎으로 끌어올렸다. 양이의 등에 쿵쾅대는 제 가슴을 밀어붙였다. 양이의 귓바퀴며 목덜미에 입술을 퍼부었다.

“정말? 나 때문에 설레? 잠이 잘 안 올 만큼? 내가 조금은 좋아졌어?”

양이는 도가 자신을 밀어붙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말을 철회하고 도가 하는 착각을 바로잡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 고마워!”

지끈. 양이는 가슴이 경련했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뺨과 목덜미에 열감이 일었다. 발언을 부인하려던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고마워.”

도가 양이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열이 없으니 인형극은 일단 봐. 다 끝나면 약선을 부를게. 진찰받아. 잠이 안 오고 어지러우면 진작 말했어야지. 응? 내 귀한 왕비님이 몸이 허해서야 되겠어?”

도는 양이의 귓바퀴에 새처럼 입 맞췄다. 양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의 등에 스르르 기댔다. 낯꽃이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