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나왔던 계약 연애를, 제가 지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세요. 누가 그걸 말립…….”

“그걸 지금 은채경 씨랑 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제가 은채경 씨를 좋아합니다. 통자바칩을 추가한 벤티 사이즈 자바칩 프라푸치노에 생크림이 듬뿍 얹어진 아이스크림 와플을 곁들인 것만큼.” 

“이렇게 달콤해서, 어쩌라는 겁니까.”

“개명을 하고 싶습니다.”

단정히 앉은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남자의 눈꺼풀 사이로 무감한 눈동자가 슬쩍 내비쳤다. 곧게 뻗은 콧날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사내다운 턱 선이 그의 반듯한 성격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한 저녁 식사에 허허 웃음을 짓고 있던 인환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쪼르르 소파에 앉아 막 차와 과일을 입에 대려던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뭐?”

“개명이요. 개명을 해야겠습니다.”

“영칠아.”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영일이 당황한 음성으로 동생을 부르자 영칠이라 불린 남자의 무감한 시선이 스윽 돌아섰다. 어릴 적 이름을 바꿔달라고 떼쓸 때마다 참 많이도 혼났다. 그때마다 저를 감싸고 토닥여 준 이들이 바로 영일과 영이, 나이 차 많은 두 형님이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름 타령을…….”

명선이 슬쩍 뒷말을 흐리며 영칠을 바라보았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나이 마흔에 얻은 늦둥이에게 애가 쓰이는 건 사실이다. 그때, 영칠이라 이름을 짓겠다던 남편을 좀 더 말리지 못한 게 이렇게 두고두고 후회를 불러올 줄이야.

“개명 따윈 안 된다고 말씀하실 거라면 그만두십시오. 영칠이란 이름보다 땡칠이란 별명이 더 친숙한 접니다.”

“어머! 아직도 도련님 이름 갖고 놀리는 사람이 있어요?”

찻잔을 내려놓은 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영칠에게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형수님 처음 인사 오셨을 때.”

“에이, 그땐 그냥 친해지려고.”

“저 그때 중학생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월 참 빠르죠?”

옆에 앉은 남편을 돌아보며 난희가 해맑게 웃음 지었다.

“네 이름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인환이 막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 고개를 든 영칠이 재빨리 뒷말을 이어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또 들으면 벌써 삼백팔십칠 번째 듣는.”

외아들로 외롭게 자란 인환은 어려서부터 형제 많은 집을 부러워했다. 아내 명선과 결혼을 하고 마주한 첫날밤 우린 적어도 칠남매는 낳읍시다, 하고 다짐했을 정도로 인환은 자식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첫째 영일을 낳고 2년 뒤 둘째 영이를 가졌을 때만 해도 영삼, 영사…… 영칠까지 일곱을 낳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첫째 때와 달리 둘째를 낳을 때 지독한 난산으로 고생을 한 명선으로 인해 크게 가슴을 쓸어내린 인환은 바로 자식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그러다 기대도 않던 늦둥이가 십 년 가까운 세월을 훌쩍 넘어 들어서게 되었고, 이름 끝 자에 ‘칠’을 넣어 칠 남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게 된 것이다.

“오만 됐어도 이러지 않습니다. 칠은 너무 과하셨습니다.”

“칠이 과하다? 팔이랑 구도 있는데?”

눈썹을 휜 인환이 슬쩍 떠보듯 묻자 ‘그건!’이라며 대뜸 소리친 영칠이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부들부들 입술을 떨었다.

“서른두 해를 도영칠로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 새삼스럽게.”

식은 찻잔이 아쉽다는 듯 두 손으로 감싸 쥔 인환이 찻물을 머금으며 말을 흐리자 선뜻 영칠의 의견을 두둔하고 나서지 못하는 명선이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흘렸다.

특별히 모난 성격이거나 경우 없는 행동을 하는 이는 아닌데 가끔 어느 하나에 집착하거나 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다. 그 쇠심줄 같은 고집은 칠순을 넘긴 지금껏 단 한 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적당히 포기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한 길임은 그녀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동안 잘 견디는 듯하던 영칠이 반기를 든 것이다.

앞접시에 놓인 딸기를 집어 든 난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도련님 이름이요, 나름 반전 매력이 있는데.”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나름 도움을 바란 것이지 반전 매력을 끄집어 달란 것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설핏 미간을 좁힌 영칠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도련님 그렇게 눈썹 모으고 있음 얼마나 무서워 보이는데요. 근데 영칠이란 이름이 왠지 모를 친근감을 줘요.”

“그 왠지 모를 친근감을 주기 위해 이 이름을 계속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아으, 도련님은 말투도 너무 딱딱해요. 설마 연애할 때도 그러는 건 아니죠?”

난희의 질문에 온 식구의 시선이 영칠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연애라는 걸 하긴 하나?

주변의 시선을 쓱 돌아보며 그딴 걸 귀찮게 왜 하느냐고 대꾸하려던 영칠이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연애할 땐, 안 그럽니다.”

영칠의 말에 일제히 믿을 수 없단 표정들을 지었다.

‘네가?’

‘연애를?’

‘애인이 있어?’

“흠.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냐?”

평온함을 가장한 채 인환이 넌지시 물어오자 눈빛을 밝힌 영칠이 표 나지 않게 입술 끝을 들어 올리곤 허리를 바로 세웠다.

“있으면 뭐 합니까. 곧 헤어질 건데.”

느긋한 얼굴로 그가 중얼거리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왜?”

“왜요?”

곧바로 돌아온 가족들의 반응에 슬쩍 눈썹을 치켜올린 영칠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들어 올렸다. 주위를 쭉 둘러본 영칠이 손에 든 포크로 과일을 푹 찍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답니다.”

“아니, 이 땅에 영칠이란 이름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인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 영칠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게요. 저도 당당히 살아가고 싶지만 제 심장 안의 그녀는 그렇지 못한가 봅니다.”

심장 안의 그녀?

영칠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낯간지러운 표현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모두의 눈과 입이 있는 대로 쩍 벌어졌다. 그와 반대로 이를 사리문 채 숨을 삼킨 영칠은 간질간질 올라오는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느라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생각은 분명 아니었는데 연애란 말에 재깍 반응을 보이는 가족들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여 버렸다.

절대 남자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자에 관심을 둔 적도 없는 것 같다. 아이가 없는 큰형 내외나 결혼이란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며 리버럴(liberal)한 인생을 외치는 작은형까지.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손자 한번 안아보지 못한 부모님은 당연히 자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며 그가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이런 부모님의 기대를 이용하면서까지 개명을 해야 하나. 무심한 척 앉아 있지만 뾰족이 날을 세운 양심에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여기서 흔들릴 순 없었다. 보아하니 잘만 넘기면 도영네트웍스 드라마 제작기획본부장이란 긴 직함에 어울릴 만한 이름으로 개명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까 말한 대로 제 이름이 ‘도영오’만 되었어도 절대 개명 따위는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한테 제 매력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했던 게지.”

속상한 마음 반, 화가 나는 것도 반.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인환이 중얼거리자 이내 모질게 마음을 다잡은 영칠이 무심한 듯 대꾸했다.

“넘친답니다. 이름보다.”

뒤의 ‘이름보다’를 강조한 영칠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헤어지잡니다.”

누구라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부담스러워야만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정적이 흘렀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영칠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술 끝을 간신히 끌어 내린 영칠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향해 고정되는 시선에 고민에 잠겼던 인환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아이, 한번 보자.”

“네?”

예상치 못한 답에 ‘네?’ 하고 묻는 영칠의 목소리가 투박하게 갈라졌다. 목 안으로 커다란 주먹이 박혀든 것만 같았다. 그가 꿀꺽 숨을 삼켰다.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헤어지잡니다’라고 목소리를 깔면 ‘이름이 문제라면, 개명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보자꾸나’ 하고 한발 물러선 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역시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제 아버지일 리가 없다.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절대 말려들어선 안 된다. 거짓인 게 들통 나는 날엔 도영칠이 도영팔로 개명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영칠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가뜩이나 부담스럽다는 사람한테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원하는 대로 헤어져 주는 게…….”

“32년 만에 찾은 사랑을 그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지. 일단 애비가 만나보마.”

쿠구궁! 천둥이 친다.

나만 믿어라.

정말 부담스러운 미소가 영칠을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