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기억하니, 그 봄밤을?

그 노을과 그 꽃비를.

달빛보다 애틋했던 키스를.

평생보다 깊었던 우리의 순간, 순간, 순간들을.

슬픔이 무성했던 계절에도 빛나던 너는.

여자의 장미향 배인 입술이 그의 입술 사이에 갇혔다.

나의 꽃, 나의 가시.

나의 가시, 나의…….

천장에 난 사각 유리창을 통해 노을빛이 쏟아져 내렸다.

빛의 부스러기에 에워싸여,

영채와 하진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눈빛으로, 손짓으로. 다사로운 숨결과 눈물겨운 미소로.

몇 번째였을까, 이 밤의 입맞춤이.

하진의 숨결이 멀어지자

영채는 하진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얹고 또박또박 움직였다.

권.

간질임을 피우듯이,

하.

한결같은 마음을 담아,

진.

- ‘가시꽃의 이중주’는 픽션입니다. 인명, 인물, 장소, 기업명과 사건들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 유사한 부분이 본문에 등장한다면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임을 밝힙니다.

- 본문에서 “ ”는 한국어, 『 』는 영어 대화입니다.

2. 작가 소개

나자혜

‘사랑과 지혜’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

야구팬. Runner.

블로그 http://lovenwisdom.tistory.com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 출간작

플로라 (ebook)

우리들의 시간꽃

꿈꾸는 오아시스

13월의 연인들

얼음불꽃

별의 바다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3. 차례

#13. 슬픔이 심록처럼 무성하던 계절이었지

#14. 초록의 심장에게 길을 물었네

#15. 칼이 아닌 강처럼, 은도

#16. 삼만 이천 이백 쉰 여섯 조각의 너와 마이너스 원

#17. 너는 나의 바다다

#18. 나의 가시, 나의 아내

#19. 아름다운, 이토록 아름다운

#‘가시꽃의 이중주’와 함께하면 좋은 음악

#지은이의 말

4. 미리 보기

서주그룹을 둘러싼 굵직한 소식들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서주그룹 내부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8월 둘째 주 토요일, 차연은 정신율 변호사와 자택 지하 작업실에서 마주 앉았다. 서주그룹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신율의 전화를 받은 후 이뤄진 대면이었다.

“회장님께 연락드리지 않고요. 내가 사업에 대해 뭘 안다고.”

1인용 소파에 앉은 차연은 맞은편의 신율을 탐색했다.

“회장님께선 이미 아시는 일입니다.”

“회장님만 아시는 비밀을 나랑 나누러 왔다. 용감한 건가요, 무모한 건가요, 정 변호사님?”

“가장 위험한 자리가 가장 안전할 수도 있죠. 태풍의 눈이 가장 조용한 법이고요.”

신율의 눈동자가 영악하게 해반닥였다.

“태풍의 눈이라. 그래, 그 비밀 한 번 들어보죠.”

“오디세이의 권하진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래요?”

“해명수산 사장 권민욱. 권하진의 아비는 사고사한 게 아닙니다. 회장님이 살해를 지시하셨습니다. 일본 수출을 통해 연이 닿은 야쿠자 조직의 한국계 교포를 사주하셨지요.”

이런! 차연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얼른 다잡았다. 상대가 고급 정보를 흘릴 때 동요했다간 필요 이상으로 비싼 값을 치를 수 있었다.

“증거가 있나요?”

“증거 없이 제가 입을 열었겠습니까?”

신율의 입가에 간교한 미소가 어렸다.

“내가 왜 그 증거에 관심을 가져야 하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실 수 있으니까요.”

“두 마리 토끼?”

“회장님과 영채 양 말입니다. 청부 살인을 지시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회장님 인생은 끝입니다.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셔야겠죠. 그리고 권하진은 제 아비를 죽인 자의 딸을 아내로 두겠습니까? 영채 양은 버림받을 겁니다. 그걸 바라시는 거 아닌가요?”

“이것 봐요, 정 변호사! 나를 뭘로 보고.”

차연은 모욕을 당한 듯 언성을 높였다.

“내가 남편과 딸을 나락으로 밀어 넣을 성싶어요? 어디 와서 어쭙잖은 판을 벌이는 거예요?”

“아, 제 말씀은 그러니까…….”

신율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댔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서늘한 지하에 앉아 땀을 비질비질 흘려대는 꼴이라니. 차연은 속눈썹을 내렸다 치뜨기를 몇 번 반복하고 물었다.

“얼마를 원해요?”

신율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남편과 딸을 보호하려면 내가 정 변호사의 입을 막아야 하잖아요. 서주그룹 회장이 해명수산 사장의 살인을 사주했다는 증거를 넘기고 평생 입 다무는 조건으로 얼마를 원하냐고요?”

서국철. 설마 했더니 정말로 해명 사장을 죽였어? 심증만으로 서영채를 조이려고 했는데, 때맞춰 증거가 나타나주다니. 서국철을 넘기고 권하진과 거래를 해볼 수도 있겠어. 거래가 성립되면 서영채는 제 어미 꼴이 나는 거지. 제 아비를 죽인 자의 딸과 한 이불 덮을 사내는 없으니.

생각에 잠겨 있던 신율이 요구했다.

“20억 주십시오.”

“하!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서주미술관을 통해 비자금 조성해오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정 변호사는 아는 것도 많아요.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타깃이 될 수 있는데. 몸조심해야겠어요.”

차연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신율을 훑어 내렸다.

“증거를 가져와요. 신변 정리해서 가족과 외국으로 가는 조건으로 거래하죠.”

하는 거 봐서 네 가족 뒤는 봐주지. 네가 순순히 증거를 바치고 내 손에 죽어준다면 말이야.

의구심이 어린 눈빛을 쏘던 신율이 한참 만에 일어섰다.

“조만간 연락드리죠.”

“살펴 가세요.”

집사 경선은 신율을 대문까지 배웅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안채에서 나오던 승조가 눈인사를 했다.

경선은 고개를 숙였다가 승조를 마주 보았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일이 좀 많아서요.”

승조가 덤덤히 대꾸하고 그녀를 지나쳤다. 승조의 절도 있는 걸음이 멀어지도록 경선은 승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돌길을 걸어 나가는 승조의 어깨에 쓸쓸함이 가득했다. 그 긴긴 세월을. 경선은 울컥하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승조가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며칠 전에 영채를 만났습니다.”

“잘 지내던가요?”

“도희, 눈 감았답니다.”

“네에.”

“알고 계셨던 겁니까?”

“요즘 연락이 뜸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나 봅니다.”

경선은 하진에게서 도희 소식을 전해들은 사실을 숨겼다.

“집사님이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서님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승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집사님.”

“네.”

“여기서 나가시면 지내실 곳은 있습니까?”

“마땅히…….”

“알아보십시오. 되도록이면 빨리.”

경선은 고개를 들어 승조를 보았다. 승조의 얼굴에 흐르는 처연한 결의와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 사이로 눅지근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심록의 나뭇잎들을 쓰는 바람에 태풍의 기운이 숨어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경선은 숨죽여 대답하고, 주위를 살핀 후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서 나오던 서 회장은 경선의 안내를 받아 정원을 나서는 남자를 보았다. 정신율 아닌가?

「재익 오빠 친부가 누군지 아세요?」

영채의 말이 생각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지하로 내려간 서 회장은 차연의 작업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정신율이 당신 만나고 간 건가?”

테이블에 놓인 책들을 정리하던 차연이 고까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래요.”

“무슨 일로?”

“내가 무슨 일로 사람들 만나는지 당신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해요?”

서 회장은 차연의 팔을 홱 붙들었다.

“정부를 집에까지 끌어들이는 건 꼴사납지 않아?”

“뭐라고요?”

“집으로 끌어들이면 의심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남편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차연이 잡힌 팔을 뿌리치고 쏘아붙였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미쳤어요? 당신이랑 같은 부류로 엮지 마. 모욕적이니까.”

“그럼 정신율이 왜 당신을 만나고 가!”

“켕기는 거라도 있나 보죠?”

“똑바로 대답 못 하겠소!”

“회사 일에나 신경 써요. 지금 서주가 여기저기서 웃음거리 되는 바람에, 얼굴 들고 다니기 곤란하니까. 사업에 자신 없으면 고이 키운 막내딸이라도 써먹어보든지.”

“뭐라고?”

“권하진 그 애송이한테 당하는 모양이던데, 영채라도 이용해보라고요. 뭘 해서든 회사는 건져야 할 거 아니에요?”

“영채가 우리한테 냉랭한 게 누구 때문인데! 품안에 있을 때 잘 거두라고 몇 번을 말했어, 내가!”

“어디다 산 채로 파묻지 않은 게 다행인 줄 알아! 그 애를 내 손으로 키운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

“그래서 재익이는 온갖 사고 치고 다녀도 그렇게 감쌌냐? 네 새끼라서.”

“당신 새끼는 아니야? 여자 건드리고 다니는 솜씨 하난 당신을 빼다박았잖아.”

계단을 내려오던 영빈은 열린 작업실 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고성에 멈춰 섰다.

짝!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재익이 정신율 씨인 거 알고 있어.”

“당신, 돌았어?”

“당당하면 친자 검사라도 해보든지.”

“내가 내 아들을 두고 왜 그런 검사를 해.”

“정말 정신율 씨 아니야?”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물건이 던져지는 소리. 뭔가가 벽에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 모지락스럽고 앙칼진 고성.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영빈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올라 2층 방으로 갔다. 휴대전화를 집어든 손이 영채의 이름을 검색하고 통화를 연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