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칠 일의 여유를 주지. 그 안에 나를 설득한다면 나머지 시간도 돌려주도록 하겠다.”

궁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려던 단영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의종의 강요 아닌 제안이었다.

단영은 그에게 협조한 후 궁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엉켜버린 실타래는 쉬이 풀리지 않는다.

“신첩이 모른다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십니다. 언제 이 몸을 내쳐야 할지 그 기회만 엿보고 계실 것 아닙니까?”

2. 작가 소개

불유체

필명 불유체 / 박정희

현재 피우리넷에서 활동 중.

▣ 출간작

한여름 밤의 꿈 1, 2

플러스

업타운 걸

그녀를 겨냥하라(ebook)

그대로부터 일주일(ebook)

이다지도 사소한 사랑(ebook) 外

3. 차례

#제1장. 심심상인(心心相印)

#제2장. 자황(紫皇)의 결(缺)

#애(愛)오라기 하나

#애(愛)오라기 둘

#애(愛)오라기 셋

#외전 : 한 닢의 기사

#작가 후기

4. 미리 보기

한참을 잠든 옹주의 이마만을 내려다보던 의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를 보내주겠다.”

환청을 들었는가 싶어 단영은 의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데려올 때부터 나의 과오로 시작된 일, 오기 전과 같이 매이지 않은 몸으로 보내줄 것이다.”

단영은, 그녀는 결코 죽음 따위에 지지 않을 거라 믿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아직도 여전했다. 중전은 강한 여인이니까 언제까지고 삶에 굴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단영이 자신에게 반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왕위를 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버리고 다른 이를 택하는 것, 그것 또한 의종에게는 반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곁에 둘 수 없다면 먼저 보내주는 편이 죽음이나 배신보다 견디기 쉬울 듯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의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수하, 두릅이란 자의 새로운 이름이 이기라 하는가?”

“예.”

“그대가 지어줬을 테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몰라 대답을 미루었다. 의종이 다시 말했다.

“그자, 내일이면 의금부에서 풀려날 것이다. 경기어사 정석영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자의 무고를 보장한다 하기에 믿기로 하였다. 그러니 그대는…….”

의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는 그자를 따르라. 지금 같은 때 사람 하나 죽은 목숨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을 터.”

단영 또한 반란군에게 피습당한 것으로 꾸며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뜻이었다. 즉 이 혼약을 무효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권력의 힘으로 단영을 한평생 궐 안에 가두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도 할 생각이었으나,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의종은 천천히 문을 향하여 걸었다. 그리고 곧 들려온 단영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뭐라고 하였나?”

“싫다고 하였습니다.”

단영의 단호한 어투에 의종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째서? 무엇이 싫단 말인가?”

“신첩이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어째서 그 아이를 따라 도망치듯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의종은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대부가의 여인으로서 마음보다는 법규를 따르겠다는 뜻인가. 허나 그가 아는 단영은 법규에 연연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모르나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데도 이리 대응을 하니 의종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렇다면 내 손수 꽃가마라도 태워줄까? 그대 머리에 족두리까지 얹어주길 원하였나?”

명치를 가격하는 충격. 단영은 숨을 깊이깊이 들이쉬었다.

“가례를 올리던 날 전하께선 이 혼인을 이어갈 의지가 없으니 소박을 놓으리라 하셨습니다. 근일에는 또 신첩더러 교태전 안에서만 살고 교태전에서 죽으라 그리 명을 바꾸셨지요.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번엔 아무 사내와 부부의 연을 맺으라 하시는 것입니까?”

“아무 사내? 지금 아무 사내라 하였는가?”

의종이 어이가 없어 반문하자 단영이 지지 않고 대꾸를 하였다.

“아닙니다. 실은 아무 사내가 아니지요. 그 아이는 사가 시절 신첩이 의지하였고 또 신첩에게 의지하였던 동무입니다. 신첩은 그 아이가 언제든 화평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며 또한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내줄 수 있으나 단 하나, 부부의 연을 맺으라 하신다면 이는 따를 수 없습니다. 첫째, 신첩은 이미 혼례를 치렀으니 설사 폐비가 된다 하여도 다른 이를 찾지 않을 것이요, 둘째, 그 아이가 열일곱의 장성한 사내라 하나 신첩에겐 그저 어린 시절 사가에서부터 돌보던 피붙이 같은 인연일 뿐 어떠한 사심도 없으니 남녀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노기 섞인 단영의 목소리는 어두운 가은당을 빠르게 채웠다. 의종은 뭐라 말을 이어가려다가 단영에게 말허리가 잘린 듯 한 손을 들어 올린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녀의 말이 끝나자 한숨을 쉬듯 손을 내렸다. 별안간 입을 다물게 만드는 언변,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질리게 겪어놓고도 대할 때마다 새롭고 또 어이없었다.

“피붙이라고?”

마침내 의종이 반문했다.

“예.”

“그만큼 그자를 아낀다는 소리인가?”

“예.”

물러섬 없는 단영의 대답을 들으며 의종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원래는 지금의 대답만으로도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아끼는 자라니, 설사 그렇다 해도 임금이며 지아비인 자신의 앞에서 쉽게 내뱉을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피붙이처럼 아낀다는 말이 왜 이렇게 기꺼운지 모르겠다. 단영의 성품을 알기에 그럴 것이다. 겁이 없어 생각한 바를 거르지 않고 탁탁 뱉어낼지언정 없는 말을 지어내는 여인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가은당 내부를 둘러보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그토록 격분하였는데 일언지하에 막혀 어찌나 무안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의문이 비집고 들어왔다. 조금 전에도 단영은 ‘설사 폐비가 된다 하여도’라고 말했던 것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예전부터 폐비가 되는 것을 오히려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던 그녀였다.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폐서인뿐이다, 이 말인가?”

이리 묻는 의종의 안색이 골똘하다. 단영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받았다.

“원하고는 있사오나 그것뿐은 아닙니다.”

의종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뭐라 하였지?”

“원하고는 있사오나 그것뿐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말인즉슨 폐서인이 되는데 조건이 붙는다는 뜻인가.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신첩은 내면이 곱지 않으며 언행이 심히 좋지 않고 여인으로서의 부덕 또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국모라 하는 막중한 자리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하여 전하께서 처음 폐비를 거론하셨을 때 이미 그 길이 신첩의 길이라 수긍하였고 한 치의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하오나 지금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고 신첩의 생각에도 변화가 있었은즉, 만일 전하께옵서 전일의 잘못을 되돌리시고 궁에 머물라 하명하신다면 그러겠노라 대답을 올릴 심산이었습니다. 마침 유사한 말씀을 내린 적도 있으셨지요. 지금은…… 다시 거두셨지만 말입니다.”

단영을 바라보는 의종의 한쪽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임금 스스로 지난 잘못을 사죄하고 다시금 그녀에게 궁에 있으라 청할 것을 요구 중인 것이다. 일이 이처럼 우습게 돌아가는 것에 의종은 할 말을 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먼저 책잡힐 소리를 하였으니 반박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어찌 그렇다고 임금인 자신이 중전에게 하소연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신첩이 나가길 원하십니까?”

담담한 음색이 이제 제법 어두워진 방 안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의종은 무렴함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단영을 쳐다보았다. 어슴푸레한 속에서 그녀의 마주 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쩐지 그런 그녀의 당당함이 좋았다.

“……아니.”

목이 잠겨 생각보다 작게 대답이 나간다. 단영이 다시 물어왔고 의종이 다시 대답하였다.

“그대가 나가는 걸 원하지 않아.”

아마도, 어둠 속이어서 확신할 순 없으나 아마도 단영의 웃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황공하오나 언제부터 결심을 바꾸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극히 공손하되 아직 단영은 그가 첫날 보였던 무례를 봐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계비는 쉬운 여인이 아닌 것이다.

“잘 모르겠다.”

사실이었다. 언제 결심이 바뀌었는지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언제 그녀가 여인으로 보였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그녀만이 여인으로 보였는지 그런 것을 생각한 적 없는 것처럼.

“내가 그대에게…… 상처를 주었나?”

“예.”

의종은 그랬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로소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거리낌 없이 폐서인이란 말을 받아들이는 단영에 의해 그 또한 상처를 받았었다. 그러니 그날의 일이 상처였노라 털어놓는 단영의 고백은 반대로 의종의 상처를 덮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의종은 발밑을 내려다보다가 어눌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 경거망동을 사과하지.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번복하는 일이 없겠노라 약조하겠다. 그대는, 그대는 이제 만족하는가.”

실은 다른 것을 묻고 싶었으나 차마 꺼내질 못해 고민하던 의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러니까 그대는…….”

그리고 어김없이 이들을 가로막는 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신 홍성중, 전하께 알현을 청하옵니다.”

홍 내관이 돌아온 것이다. 의종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들라.”

임금의 목소리가 왜 이다지도 침통한지 알 길이 없는 홍 내관, 그저 자빈의 사고로 마음이 상하였다 추측하며 바쁜 걸음으로 들어섰다. 잠시 그의 귀엣말을 듣던 의종이 말하였다.

“편전으로 가야겠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서 나가는 의종. 단영도 교태전으로 돌아가야겠단 생각에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홍 내관이 다시 예를 차리며 뒤늦게 중전께 인사를 올렸다.

“그래, 의주까지 다녀왔다고요?”

지금껏 먼발치로나 봐왔지 제대로 대면해본 적 없는 중전마마였다.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예, 대답을 하던 홍 내관은 설핏 드는 어떤 느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내실이기에 중전의 모습은 흐릿하게만 비칠 뿐이었다. 여태 불도 안 밝히고 두 분 마마가 뭐 하셨나 싶은 생각도 잠깐, 좀 전의 싸한 느낌이 홍 내관을 감쌌다.

“먼 길에 고단하겠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는 중전의 뒤태, 그런데 그런 그녀의 뒤태가 참으로 이상하다. 뭐랄까, 늘 뵙던 것 같은, 늘 말이 오갔던 것 같은 친숙함이라고 해야 하나. 몇 걸음 떨어져 가은당을 나서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던 홍 내관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앞서 가는 단영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목소리는 어사 윤단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