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내가 이름을 부를 수 있기 전에 알았던

꽃처럼,

지금 그대를 기억합니다

사라진 약혼자를 기다리며 글을 쓰는 작가 예신.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나타난 화가 한준은 단조롭던 삶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순간, 예신은 과거의 사랑이 멀어져감을 깨닫는데…….

“이렇게 좋은데, 이게 어떻게 나쁜 사랑일 수 있어요?”

예신은 눈을 천천히 떴다. 

준이 고개를 숙이고 아주 가까이서 눈을 맞췄다.

“안 그래요?”

예신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숨결에 실려 새어나가려는 진심을 붙드는 것이 너무 아팠을 때 준의 속삭임이 심장에 꽂혔다.

“이건 확실히, 좋은 사랑 맞아.”

예신은 들고 있던 꽃을 놓쳐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준의 뺨을 어루만지자 준이 그녀의 손을 감아쥐었다.

“그러니까 이 사랑, 합시다.”

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본문에서 “ ”는 한국어, 『 』는 영어입니다.

2. 작가 소개

나자혜

느린 여행과 굽 낮은 신발과 승패가 가려지는 야구 경기를 좋아하며, 걷거나 뛰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발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트위터: www.twitter.com/lovenwisdom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3. 차례

#여섯. 우리의 이름은 사랑

#일곱. 기억의 강을 따라 사랑이 흐를 테니

#여덟. 우리 꽃처럼 사랑하기를

#아홉. 두 도시 이야기

#열. 시들지 않고 반짝이는 것들

#열하나. 그리고 시간꽃……

#에필로그

#작가 후기

4. 미리 보기

뽀드득 눈 밟는 소리에 섞여 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뭐 해요?”

“꽃 주워요.”

예신은 준을 향해 돌아서서 꽃잎들이 쌓인 손을 내밀었다.

“주워서 뭐하게요?” 

“그냥 주워요. 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걸 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나, 참 무심하죠?”

“무심하지. 아주 많이.”

준이 발치에서 붉은 꽃잎을 주워 그녀의 머리카락에 꽂았다. 예신은 볼을 발그레 붉히면서 준을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살짝 들리고, 꽃줄기가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져들고. 준의 섬세한 손길 아래서 그녀가 꽃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꽃을 고정시킨 준이 그녀의 눈앞에 활짝 편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자, 예쁜지 봐요.”

“손바닥이 거울이에요?”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봐요. 그러면 보여요.”

예신은 생긋 웃었다가 준의 손바닥 앞에서 눈을 깜박거렸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면서 거울 보는 시늉을 하자 준이 씩 웃고는 손바닥에 입을 쪽 맞췄다.

“하, 내 손바닥에 들어온 강예신.”

“실없어.”

예신은 핀잔을 놓고 준을 지나쳐 걸었다. 부끄러움에 타박하긴 했지만, 머리에 꽂힌 꽃을 만져보는 손길이 떨렸다.

어젯밤 언제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 준이 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것을 빼면 집을 나설 때의 차림 그대로였는데 불편한 줄도 몰랐다. 오랜만에 깊고 달콤한 잠을, 꿈도 없이 잤다. 얼음을 토해내서인지 준과 체온을 나누며 밤을 보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신은 담요 속에 숨어서, 그녀를 마주 본 채 잠든 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가뭇한 수염과 눈가의 그늘을 눈으로 더듬고 있는데, 준이 불쑥 말했다.

“그러다 잡아먹히는 수가 있어요.”

잠겨 있지만 확실히 잠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깨 있었어요?”

“아직 꿈속이에요.”

“나도 꿈이에요?”

“이렇게 얌전한 거 보면, 꿈 맞아요.”

헝클어진 모습으로 실없는 소리를 하는 준이 꽤 섹시했다. 예신은 담요에서 뺀 손을 준의 입술에 갖다 댔다. 육감적인 입술의 윤곽을 더듬거리는데 준이 그녀의 손가락을 기습적으로 물었다.

“어!”

예신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준이 껄껄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쥐었다.

“좀 더 자요.”

침대 맡 창가로 내보이는 하늘이 해말끔했다. 햇살이 부담스럽지 않게 밝아 고운 아침이었다.

“저기요, 한준 씨. 지금, 하늘이 예뻐요.”

“그래요?”

“눈 뜨고 좀 봐요.” 

“눈 감고 조용히 하면 더 예쁠 거야.”

하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준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준에게서 상쾌한 풀냄새가 났다. 훈훈한 바람이 휘돌아나가는 숲을 그리며 예신은 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예쁘다, 강예신.”

준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이 감겼고, 그렇게 그녀는 몇 시간 더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준의 어깨 너머로 하늘에 은은한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 그녀가 하루를 시작한 방식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예신은 수반에 물을 채우고 꽃잎들을 띄웠다.

“아침, 어떻게 할래요?”

준이 냉장고 안의 그릇을 되작거리며 물었다.

“햄 샌드위치 돼요? 치즈랑 계란 얹어서?”

예신은 오랜만에 생생한 허기를 느꼈다. 준이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더니 그녀를 물끄러미 봤다.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요.”

예신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헝클었다.

“자기가 예쁜 줄 몰라서 더 예쁜 강예신. 원하는 거 콕 짚어서 해달라는 거, 예쁘다고.”

오늘 절반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예쁘다는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자주 예쁘다는 말을 듣다 보면 정말로 예뻐질 것 같다.

“아침 먹고 뭐 할래요?”

준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예신은 생각에 잠겼다가 되물었다.

“앞으로 뭐 하고 놀지 우리 같이 시간표 짜볼래요?”

준이 껄껄 웃어버렸다.

“누가 시간표를 짜서 놀아?”

“난 시간표 짜서 놀아요.”

예신은 새침하게 대꾸하고 냉장고에서 계란과 햄을 꺼냈다. 준이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었고 잠시 후, 두 개의 햄에그 샌드위치가 식탁에 놓였다.

아침을 먹으면서 예신은 취재를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다. 한국사 연구 계간지에서 청탁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탐방기를 써야 했다. 박물관에 가본 지가 1년은 족히 되는지라 다시 둘러보고 초안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예신이 박물관에 가야겠다고 하자 준이 동행하겠다 했고,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2차 세계대전 일본군 성 학대 피해자들의 실상을 보존한 곳으로 홍대 근처에 있었다. 준과 예신은 지하철을 타고 홍대입구 역으로 이동했다. 역내에 붙은 주변 안내도를 보고 3번 출구로 나오니 햇살이 따사로운 거리가 그들을 맞았다. 간밤에 내렸던 눈이 녹아 인도가 축축했지만, 걷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십오 분쯤 걸어 은행이 모여 있는 큰 사거리까지 간 예신과 준은 길을 건넜다. 꽃집과 스카프 가게를 지나쳐 골목으로 들어가니 주택가가 나타났다. 박물관은 야트막한 오르막길 중간쯤에 있었다. 주택을 개조하여 개관한 곳이었는데, 검정색 외관 벽이 간결하고 비장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자 매표소를 겸한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로봇이 앉아 있었다. 빨간 땡땡이 무늬 리본을 손목에 두른 로봇은 박물관의 위치를 문의해 오는 듯한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로봇이 통화를 끝내길 기다린 예신은 성인용 표 두 장을 사서 한 장을 준에게 건넸다.

박물관은 지하실을 보고 2층과 1층 순으로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예신이 지하층으로 가기 위해 철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머리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포탄과 군화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피해자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준은 예신의 설명을 듣고 자갈길을 걸었다. 자갈길을 따라 선 시멘트벽에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군함 끝에 선 치마저고리 차림의 소녀. 고목 아래 발가벗은 채 누운 소녀. 일본군의 총부리 앞에서 공포에 질린 소녀. 성 학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손수 그렸다는 그림들은 한 점 한 점이 신산한 삶의 증거였다.

자갈길의 끝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 지하에 이르렀을 때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음습한 공간에 떠돌던 정체 모를 슬픔이 그물처럼 온몸을 일순간 휘감았다. 준은 돌연 뻑뻑해진 숨을 고르다가 왼쪽 벽에 난 틈을 보았다.

예신이 틈 너머의 좁은 공간을 가리켰다.

“위안소예요.”

어두컴컴한 방에 거적이 깔려 있고 그 위로 신발 두 켤레가 뒹굴었다. 투박한 군화와 소녀의 발에 맞을 만한 크기의 낡은 신발. 창 하나 없는 절망스런 공간에 전시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유린하는 자의 폭력과 유린당하는 자의 비애가 생생히 전해졌다.

준은 언젠가 나치가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산더미처럼 쌓인 낡은 신발들을 본 것을 기억했다. 수용소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압수당한 신발들이었다. 가스실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 사백만이었다던가, 오백만이었다던가.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아득했던 숫자들이 주인을 잃은 신발들 앞에 섰을 때야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공포가 되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작은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 잔혹히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의 혼이 낡은 신발 한 켤레에 응축되어 있었다. 뾰족한 압정에 발바닥을 찔린 듯 예리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다.

-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 뒤에서 서러운 흐느낌 소리가 들려 준은 돌아섰다. 지하실에서는 영상물이 상영 중이었다. 프로젝터가 비춘 벽에 한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투영됐다. 투박한 회색 벽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이 애잔했고, 과거를 회고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서럽게 갈라졌다.

- 그래도 어째? 살아야지.

프로젝터가 내뿜는 빛에 햇살이 얹혔다. 천장에 난 사각형 유리창 너머에서 일광이 떨어지고 있었다. 

예신이 햇살 한 줌 잡아보려는 듯 팔을 뻗어 올렸다. 

“이 박물관에서 이 자리가 제일 가슴 뭉클해요. 여기 모셔진 분들, 평생 고통과 싸운 분들이었는데. 우리의 어제가 아무리 아팠어도 오늘은 희망으로 색칠하자고 그분들이 다독여주시는 것 같아요. 올 때마다 생각해요. 이게 서울에서 가장 눈물겨운 햇살이라고.”

늘 슬픔이 살얼음처럼 깔려 있던 예신의 얼굴에 모처럼 온기가 돌았다. 순결한 햇살에 물들어가는 꽃 같은 얼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꼭 한 줌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온 마음으로 기억하고 싶은 그림이었다.

준은 예신의 손을 감싸 쥐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올랐다. 계단 옆 벽 곳곳에 성 학대 피해자들이 남긴 메시지들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바로 증거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우리가 겪었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메시지들을 읽던 예신이 속삭였다.

“아파도 기억해야만 할 것들이 있어요.”

예신의 손을 잡은 준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2층에 도착한 예신이 베란다로 나갔다. 성 학대 피해자들의 영정 사진들이 모셔져 있고 헌화를 할 수 있게 된 곳이었다. 예신이 꽃병에서 카네이션 한 송이를 집어 헌화하는 동안 준은 영정 사진들 맞은편에 있는 모금함을 살폈다. 전자결제가 가능한 디지털 모금함 옆에 헌화할 꽃을 꾸준히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휴대전화를 모금함에 대자 액수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백만 원을 선택하고 확인을 누르는데 예신이 옆에 와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참 기특해요.”

준은 예신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일어서 손을 내밀었다. 예신이 그의 손을 잡고서 전시실로 들어갔다.

2층에는 각종 전시물과 영상자료들이 있었다. 십 대 중반쯤의 소녀와 중년 여자가 전시물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가리키며 소녀에게 설명을 해주던 여자가 티슈로 간간이 눈가를 훔쳤다. 여자의 설명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소녀는 여자가 울먹이면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다독였다.

준과 예신은 한 성 학대 피해자의 생애를 극화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1층으로 내려왔다. 스피커에서 애절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아노 전주를 현악기가 따르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라고 여자가 노래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가락을 붙인 곡이었다.

1층 전시물은 박물관의 설립 계기와 연혁 등을 담고 있었다. 전쟁범죄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전시물을 둘러보고, 준과 예신은 전시실과 연결된 정원으로 나갔다.

작은 잔디밭에 돌 의자가 몇 개 있는 정원은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쉬기에 좋은 곳이었다. 예신이 돌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준은 예신의 옆자리에 앉으려다 그녀의 이마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여드름이 늘었네.”

“얼음을 쏟아내고 나면 트러블이 더 생겨요.”

예신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준은 잔디밭 가장자리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손을 씻고 와 예신 앞에 섰다.

“얼굴 좀 들어봐요.”

예신이 들어 올린 얼굴에 햇살이 일렁였다. 준은 몸을 굽히고 예신의 이마에 난 여드름을 짰다. 하얗게 멍울진 여드름을 짜고 그 옆에 난 자잘한 여드름을 살피는데 예신이 웃었다.

“안 아프게 잘 짜네요.”

“내가 손재주가 좋아요.”

준은 작은 여드름을 마저 터트렸다. 

“그가 순결한 손으로 그녀의 외로움을 짰다.”

예신이 시를 읊조리듯 말했다. 예신의 싯병에 전염되었는지 그도 시를 읽듯 화답하게 되었다.

“햇살 아래서 그녀의 외로움이 말갛게 터져 나왔다.”

예신이 어깨가 달싹여지도록 큰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한준 씨.”

“음.”

“예전에 내가 좀 어지러웠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음.”

“지금, 좀 어지러워요. 사계절을 동시에 앓는 것 같아요.”

바닐라 색 스웨터를 입은 예신을 준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당신이랑 다 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뭘요?”

“사랑. 연애. 섹스.”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면서 예신이 이마를 쓸려 했다.

“만지지 말아요. 덧나요.”

준은 예신의 손목을 탁 잡았다. 무엇엔가 감전된 듯 예신이 손을 움찔했다.

준은 예신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방금 당신의 외로움을 짰잖아. 그거면 한 방에 사랑, 연애, 섹스 해결한 거 아닌가?”

예신은 눈을 찡긋하는 준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건달의 눈빛과 신사의 심장을 가진 남자. 어쩌다 이런 사람이 그녀에게 왔을까? 어쩌다 이 사람에게 구제불능적으로 빠져들었을까? 이런 게 사랑일까? 운명적인 우연과 우연적인 운명이 엮은 그물에 걸려 서서히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그 상실의 끝에 돋아난 뭔가를 꽃처럼 키우고 싶어지는 것. 그런데 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을까? 사랑에 못 미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을 넘어서버린 것도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 연애. 섹스. 그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이미 넘어와버렸기에 준과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슬픈 시를 꼭꼭 씹어 읽는 것처럼, 가슴이 서걱거렸다.

“한준 씨. 우리 술 마시러 갈래요?”

“술은 외로움을 더 돋아나게 할 텐데.”

“취해서 당신의 외로움이 돋아나오면 내가 그걸 짜줄게요.”

준이 허를 찔린 것처럼 하, 웃더니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왜 그래요?”

예신은 준에게 끌려가듯 걸었다. 박물관을 나서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준이 큰길 꽃집 앞에 이르러서야 손을 놓았다.

“방금 그 말, 내가 살면서 들어본 같이 자자는 대사 중에 가장 도발적인 거였다고. 신성한 박물관에서 사고 칠 뻔했잖아.”

“외로워서 나랑 함께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잖아요. 외로움을 짜내고 나면 뭐가 남을지 궁금하지 않아요? 여전히 나랑 함께하고 싶은지도?”

예신은 준을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뭐가 우스운지 말하는 내내 준이 피식피식 웃었다.

“난 생각 많이 하고 하는 말인데, 웃기는. 한준 씨, 그거 상당히 고약한 버릇이에요.”

“당신 문제가 뭔지 알겠어서.”

“문제라뇨?”

“당신 문제는 소설 쓰듯이 사랑을 하려 한다는 거야.”

“그러면 안 돼요?”

“사랑하는데 기승전결을 왜 따져요? 닥치고 하면 되지. 사랑은 개연성 없어도 괜찮고, 인과관계 안 맞아도 괜찮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안 지켜도 괜찮아요.”

예신은 준에게 동의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증명해봐요?”

준이 오기스럽게 눈썹을 휘어 올렸다.

“증명해봐요.”

예신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준이 꽃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전시된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산 준은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꽃집을 나왔다. 투명한 비닐에 대충 감싸인 프리지아 한 다발이 그녀에게 안겼다.

“어때요?”

“뭐가요?”

“우리가 소설 주인공들이라면, 여기서 꽃 사는 거 뜬금없잖아요.”

“네.”

“그런데 꽃 받으니까 기분 좋죠?” 

“네.” 

“바로 그거예요. 뜬금없는 행위라도 기분이 좋으면 된다고. 그게 바로 좋은 사랑이고, 좋은 연애라니까.”

예신은 빙긋 미소 짓다가 목구멍을 찌르는 싸한 슬픔을 느꼈다. 코끝에도 찡한 기운이 맺혀 입술을 깨물자 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아니 하려는 게 좋은…… 연애일까 싶어서.”

“나쁜 연애 같아요?”

예신은 대답을 못했다.

“연애 같긴 해요?”

준이 조급스럽게 물었다.

“그게……. 연애라는 게…….”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준이 그녀의 팔을 홱 끌어당겼다. 준의 든든한 품에 온몸이 쏙 안겼을 때 준이 야단치듯 속삭였다.

“머리에 묻지 말고 가슴에 물어야지.

“꽃 망가져요.”

“또 사줄게요.”

“다른 꽃은 싫어요.”

예신은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사실은 나도 다른 꽃 싫어요.”

준이 나직이 중얼거리고 긴 숨을 후우 내뱉었다.

“참 웃기지. 안고 싶은 꽃을 마음껏 안으면 그 꽃이 다칠 것 같거든.”

“그러니까 놔줘요.”

“놔주세요, 라고 부탁하면.”

예신은 아련한 슬픔이 심장으로 스며드는 걸 견뎠다.

“차마, 그렇게 부탁 못 하겠죠?”

준의 깊은 목소리가 지옥의 유혹처럼 뜨거웠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자꾸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죠? 그런데 말이야, 강예신 씨. 그렇게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당신 진심이야. 그 진심을 한번 믿어봐요.”

“제발…….”

예신은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음?”

준이 고개를 숙였다. 

“제발, 날 놓지 말아요.”

물기 먹은 속삭임이 그녀의 몸 안에서 애처롭게 공명했다. 준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물고기를 품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말했잖아요. 부탁해도 안 놔준다고.”

가슴에 가슴을 맞대고, 두 심장이 하나처럼 뛰는 것을 느끼는 동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갑던 몸이 준의 체온으로 따뜻해질 즈음, 프리지아를 싼 비닐봉지가 치지락거렸다.

“어떡해?”

예신은 일그러진 꽃잎을 보고 발을 굴렀다.

“꽃은 다시 사준다니까.”

준은 자신만만하게 예신을 다독였다.

“그게 아니라요…….”

“그럼 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강예신답지 않게.”

예신이 그를 힐긋 올려다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생각을 하긴 했는데, 말하긴 싫어요. 말하면 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미친 사람 되기 싫어서 눈 앞에 있는 사람은 궁금해 미치거나 말거나 상관 없다는 건가?”

“정 궁금하면 술 마시러 가요, 우리. 취중에 고백할 테니까 당신도 듣자마자 잊어버려요.”

“그건 싫은데.”

준은 팽팽해진 목소리로 거절하고 예신의 몸을 복부에 바짝 댔다.

“게다가 지금은 여기서 한 발짝도 못 움직여요.”

다리 사이에 와닿는 딱딱한 느낌에 예신은 눈을 화락 떴다.

“이 몸,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준의 귀엣말에 그녀는 입만 벙긋거렸다. 여기서, 어떤 방식으로, 이 몸을 책임지란 말이야?

“눈 감아봐요.”

준이 속삭이자 예신은 외려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겁내지 말고, 눈 감아봐요.”

절대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준의 눈빛에 담긴 것이 수컷의 욕망뿐이었다면. 그런데 그의 속삭임이 다정하고 순결하기 그지없어 예신은 눈을 내리감게 되었다.

준이 숨을 골랐다. 깊게 들고나기를 반복하는 그의 숨결에 그녀의 숨결이 맞춰졌다.

“지금은 우리의 계절이에요. 여름이건, 가을이건, 세상이 붙인 이름 따위는 잊어버려요. 여기, 나랑 당신이랑 단둘이고 세상 아무 것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차 소리와 행인들의 걸음소리가 아득해지고, 가로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준이 그녀의 등 아래쪽을 지그시 눌렀다. 척추 마디마디를 누르며 올라온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흥분과 두려움이 촘촘히 뒤엉켜, 예신은 한기마저 느꼈다.

준이 목걸이 잠금 장치를 만지작거리다 목덜미에 작은 원을 그렸다. 동그라미 하나. 동그라미 둘. 외로움 하나. 외로움 둘. 작은 동그라미들이 사슬처럼 이어지며 살갗을 자극하는 동안 온 몸이 발갛게 익어갔다. 작은 불덩이들이 피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을 때 더운 숨결이 이마를 쓸었다.

“이렇게 좋은데, 이게 어떻게 나쁜 사랑일 수 있어요?”

예신은 눈을 천천히 떴다.

준이 고개를 숙이고 아주 가까이서 눈을 맞췄다.

“안 그래요?”

예신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숨결에 실려 새어나가려는 진심을 붙드는 것이 너무 아팠을 때 준의 속삭임이 심장에 꽂혔다.

“이건 확실히, 좋은 사랑 맞아.”

예신은 들고 있던 꽃을 놓쳐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준의 뺨을 어루만지자 준이 그녀의 손을 감아쥐었다.

“그러니까 이 사랑, 합시다.”

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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