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피어있는 꽃이었다. 물을 주지도 햇빛을 주지도 않았지만 저절로 자라난 어느 이름 모를 꽃이 탐스러워 한 번 향기나 맡아보려 몸을 기울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꽃에 얼굴을 파묻고 취해있는 중이었다. 민석은 10년 동안 보듬어 주지 못했던 꽃의 줄기를 따라 마디를 찾고 있었다. 어디부터 꺾어야 자신을 기억하는 물줄기를 머금은 꽃줄기가 나오려나 어느 마디를 꺾어야 제 방에 꽂아두고 오랫동안 볼 수 있으려나.
“미안…… 잠깐 현기증이 나서.”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은 것 같다. 진짜 갈게.”
민석은 906호로 돌아와 좀 전의 충동적으로 한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 초인종을 눌러 마주했던 여자는 이마에 빨간 언덕을 만들고 자신을 웃게 하더니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자신을 10여 년 전 그 시기에 가둬버렸다.
여진의 마음 역시 혼란스러웠다. 방으로 들어가 PC전원을 켜고 유성우의 CD를 들으려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희미해져 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무엇 때문일까? 유성우의 감미로운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좀 전의 맡았던 낯익은 향기 때문일까, 여진은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다!”
여진은 어느새 그 날을 기억해냈다. 뜨거운 햇볕을 가린 지붕 그늘을 등지고서 강아지와 시간을 보냈던 그 날. 여진은 그 날 민석이 두고 갔던 아이스크림을 기억 속에서 집어 들고 있었다.
“다 기억났다 이거야. 코피 터뜨린 것도 모자라서 이젠 별 짓을 다 하네.”
그렇게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었다. 민석이 처음 강현의 집에 놀러왔던 날도, 수도 없이 공부를 하러 들렀던 새털 같이 많은 날들도 하나 둘 여진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설렘도 뭣도 아닌 그저 오빠의 친구로 혹은 잘생긴 동네 오빠쯤이었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뭐야, 대체. 아까 그 행동은 대체 뭐냐고?”
906호의 민석 역시 그 행동의 의미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여전히 여진의 등은 부드러웠다. 여진의 머리카락에서 옅은 바닐라 향기가 났고, 자신의 가슴에 닿았던 따뜻한 온기는 어느새 여자가 되어있었다. 달콤한 마멀레이드 같은, 폭신한 마시멜로우 같기도 한 여진의 느낌이 떠오르고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자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자신만의 공식을 세워보았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떠서……도 생각이 난다면…….”
마음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침착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젠장! 잠이 와야 내일 눈을 뜨던지 말던지 할 거 아니야!”

스물여덟 다중인격의 소유자.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개인 여인네.
껍질만 벗긴 레몬을 오렌지처럼 먹이치우는 괴이한 습성의 소유자.
슬픔과 절망보다 아기자기한 로맨스를 좋아하며, 읽을 때 마다 웃음이 나는 글을 쓰고 싶은 편식주의자.
대사를 사랑하고 말싸움에 중독된 정신없는 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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