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는 그녀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었다.

어깨에 짊어진 국가라는 거대한 산.

두 손에 가득 들어찬 백성.

그와 그녀는 근본적으로 짊어진 게 닮았다.

“당신도 원하지? 내가 함께 가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원하잖아. 하지만 확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내가 가면 당신이 또 어떻게 변할지. 당신은 국가를 책임지는 국왕인데 나 때문에 흔들릴까 봐.”

당신에게선 내가 갈 수 있었던 또 다른 길을 볼 수 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마음에 둔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처음 그랬던 것처럼.”

당신과 함께 있으면 마치 내가 그 길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 작가 소개

주연

트위터 @doutormocha

3. 차례

3부. Rule the world

#Chapter 2

#Chapter 3

정사

Coronation

참고문헌

4. 미리 보기

이윽고 완연한 밤이 내려앉았을 때 그들은 함께 성으로 돌아왔다. 세베르를 포함한 기사들이 앞서서 드레이크의 행방을 물었지만, 에르완은 작위식은 없던 일로 할 것이며 드레이크는 더 이상 발루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긴 설명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빠르게 납득하고 물러났다.

바스티안은 에르완과 단둘이 방에 남았다. 그녀는 허리춤의 갑옷을 풀어내리며 찬찬히 시선을 돌렸다. 바스티안은 녹아들듯 바라보았다.

“도와줄까?”

그녀는 말없이 뒤로 돌았다. 갑옷의 연결부는 대부분 뒤에 있었고, 잠그고 푸는 게 익숙하겠지만 편할 리도 없다. 손을 뻗어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신성한 의식이라도 되듯 경건하기도 했다. 차칵, 차칵. 쇠가 긁히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이내 드러나는 몸 위로 달빛이 검은 윤곽을 덧그렸다.

“이번 해전이 이례적이긴 한가 봐. 온 나라가 떠들썩하더군. 전엔 초상집이 따로 없었는데.”

허리를 감싸던 갑주를 벗겨내자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은 선이 드러났다. 툭, 올려 묶은 머리를 풀어내자 기다란 금빛 폭포가 그 위로 쏟아졌다.

“폐하 덕분입니다.”

“나?”

“해전도, 드레이크의 등용도, 폐하께서 처음 조언해주셨습니다. 저 혼자서는 이루지 못했을 승리입니다.”

“나야 뭐, 입만 나불거렸지 실질적으로 한 건 없는데. 전략도 전술도 지휘도 전부 당신이 했지. 나와 당신이 힘을 합치면 프리드리히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세계정복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말끝에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들었다. 이번만큼은 에르완 또한 희미하게 웃어, 그를 훨씬 더 들뜨게 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야?”

“…….”

“모두가 국경을 넘어서 당장 부르군트와 그 우호국들을 쳐부수자고 말하고 있어.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승리의 흐름을 탔을 때 밀어붙이자는 거지. 하지만 당신은 그들과 생각이 달라. 그렇지?”

그렇게 물으며 배를 감싸고 있던 갑옷을 벗겨냈다. 뒤에서 껴안듯 가까워져 체취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오랫동안 입술을 묻고 있었다.

먹물이 번지듯 스며들었다. 그는 금세 흠뻑 젖었다.

“휴전 협정을 제의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건 종전이잖아. 휴전이 아니라.”

“예. 종전과 다를 바 없는 휴전을 원합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추밀원들 불만스러워하는 얼굴이 벌써부터 눈앞에 선한데. 그들은 길고 험난한 전쟁 끝에 마침내 고귀한 평화를 이룩한 승자가 되려고 할 거야. 하하, 참 신기하지. 같은 나라, 같은 백성을 두었는데 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게.”

“반발이 클 것은 익히 예상하고 있습니다.”

“반발을 뚫고 프리드리히에게 당신의 제안이 닿았을 때는? 그가 받아들일 것 같아? 왕의 자존심이 무너졌어. 부르군트의 주춧돌이나 다름없는 함대가 완전히 박살 났어. 정복왕이 과연 제정신일까? 아니. 그는 끝내 거절하겠지. 악수 중의 악수를 둘 거야. 그럼에도 발루아는 휴전협정을 제의해야 해. 그래야 외부에서 보기에 바람직한 그림이거든.”

“큰 전쟁이 벌어지겠지요.”

“겁이 나?”

팔등을 감싼 갑주를 벗겨주다 멈추고 시선을 올렸다. 빛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온기는 단지 얇은 천 너머에 있을 따름이었다. 갑주가 사박사박 옷 위를 스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부르군트는 발루아가, 발루아의 여왕이 잔뜩 겁을 먹었다고 떠들어대겠지만 실은 그게 아니지. 당신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아. 다만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봐야 할지, 그 희생이 슬픈 거겠지.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까지도, 당신은 그렇겠지.”

다정하게 말하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제는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림자 한 줌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갑주로 뒤덮여 있던 팔을 더듬어 내려가 그 끝에 닿았다. 손가락 하나하나, 얽어 넣었다. 손바닥 가득 온기가 녹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상상해. 왕이 아닌 당신을. 왕으로 살지 않는 평범한 에르완을.”

“어떤 이유로 그러십니까.”

“부르군트 지휘관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을 때 나는 당신이 그쪽으로 갈 줄로만 알았어.”

페드로가 여왕을 협박했을 때를 말하고 있었다. 바스티안의 눈매가 좁혀졌다. 눈앞을 아른아른 흐리는 건 비단 안타까움만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머리로는 생각했는데, 자신할 수 없었어. 당신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인 걸, 내가 잘 아니까.”

지휘관의 죽음은 큰 혼란을 초래한다. 그녀가 페드로에게 갔더라도 그가 폭탄을 터뜨리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에르완이 스스로를 버리는 선택을 할 리 없다. 이보다 더 많은 계산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지만, 확신을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참하게도 바스티안 그 자신조차 확신이 되지 못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라 당신이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지는 몰라.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바라. 당신이 조금 더 이기적이고, 살고자 하는 욕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제 원칙에 따라 목숨조차 초연하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이게 과연 신의인가? 이것 또한 불신 아닌가?

“당신이 있어 제가 조금 더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무리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녀의 손을 끌어올려 손바닥 안쪽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정확히는 잘리어에서 그를 지키느라 남은 기다란 흉터 위에. 숨을 흠씬 들이마신다. 살갗 냄새에 흠뻑 취해 어지러워졌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사람에 대한 진심으로 충만해진 일이 없었다. 신뢰니, 믿음이니, 죄다 물정 모를 인간들이 지껄이는 말 아닌가. 그는 그런 것들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 내뱉은 한마디로도, 그 말을 내뱉기까지의 수많은 회로를 생각하고 검토하고 계산하며 검증했다. 숨을 쉬는 듯한 습관으로 불신했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검증 없이 믿게 되었다. 그녀가 아픈 걸 보느니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했다. 생소하고도 낯선 감각. 낯간지러울 정도로 맑고 순수한 감정이었다. 처음엔 토할 것같이 거북하고 스스로가 미친 것처럼 여겨지곤 했는데, 이젠 화가 났다.

그래, 화가 났다.

불같은 노여움이었다.

남을 위한다느니 남을 믿는다느니, 아무것도 진심으로 느껴서는 안 됐는데. 이러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지도 모른다는 그녀를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차라리 모르지. 몰라버리지. 그렇게 끝까지 모르면 그녀를 탓하기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평생 이기적이었던 그는 이제 잔해가 없다. 그녀를 이해하려는 그만 남았다. 우습다. 자취마저 없다.

“안심하십시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그녀가 말했다. 딱딱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어쩐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자칫 무너질 뻔한 균형이 간신히 맞춰졌다. 위험천만하게 불이 지펴진 심지가 다시 꺼져간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지지대나 다름없었다.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들었다. 어깨를 감싼 갑주는 뜯어내어 내팽개쳤다.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끌어안듯 매달렸다. 순간순간이 돌아오지 않을 꿈 같았다.

그녀가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애매하게 이마에 닿아 슬슬 문질렀다.

그가 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그가 숨을 쉬었다.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고, 그는 그 흔들림을 온전히 느꼈다.

“이곳에 머물러주십시오.”

짧은 말에 눌러 담은 진심이 보였다. 같은 마음임이 기뻤다.

기꺼이 대답했다. 응.

“밤새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대답했다. 응.

“제 곁에.”

낮고, 깊은 속삭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