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에르완 실드베르 르 블랑.

자매를 죽이고 발루아와 대륙의 중심을 휘어잡은 여왕.

바스티안 샤른호르스트.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잘리어의 부흥기를 이루어 성군이라 칭송받는 대제.

야경이 아름다운 밤, 여왕이 잘리어에 은밀하게 방문했다.

“잘리어를 방문한 이유는 따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저는 여인과 단둘이 사석을 갖지 않는데.”

“저는 여인이 아니라 국왕입니다.”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여자의 몸이지만, 국왕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까부터 국왕으로서 앉아 있었는데 폐하께서는 남자로 앉아 계셨나 봅니다.”

모든 것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홀로 지고지순한 왕.

당신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도 꼿꼿할까.

2. 작가 소개

주연

트위터 @doutormocha

3. 차례

2부. Seas set free

#Chapter 1

#Chapter 2

4. 미리 보기

“응,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보다 더 의외인 건 저 시녀지. 그렇게 잘 마실 줄은.”

“적어도 그레더니어 내에서는 레이첼을 술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없습니다.”

“그래? 그 정도였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당신도 꽤 마신 것 같은데.”

떠보듯 물으며 살폈다. 대리석으로 빚은 듯 굳은 얼굴은 미세한 변화 한 점 없다. 원체 낯빛도 분칠한 것처럼 새하얗고. 정말 안 취했나? 그만큼이나 마시고도 취기가 오르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니면 이성으로 제어하고 있는 건가?

“저는 본디 술을 잘하지 못합니다. 한 잔도 힘에 부칠 정도였지요.”

“그래? 그럼 지금은?”

바스티안이 꿍꿍이속을 숨기며 슬쩍 쳐다봤다. 취했다면 눈이 풀릴 만한데, 황금색 눈은 천년을 두드린 쇠처럼 단단하고 정제돼 있었다.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늘린 건가? 왜? 발루아에선 왕이 될 자격에 주량도 포함돼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물론 그건 아닙니다.”

“미안. 실없는 농담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취했나 보군.”

자조적인 웃음을 실실 흘리며 그가 잔을 다시 들었다. 시선은 에르완에게 내리꽂은 채다. 그녀가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언제까지 드실 겁니까?”

“마실 수 없을 때까지.”

“언제까지 빤히 보실 겁니까?”

“당신이 내 눈을 피할 때까지.”

눈을 가늘게 뜨는 그녀를 보며 그가 가볍게 눈웃음 쳤다.

“아마도 끝까지 먼저 돌리진 않겠지.”

“…….”

“그래서 좋아.”

“…….”

“나는 사람과 마주하는 게 좋거든. 하지만 왕이 된 이후로는 쉽지 않다니까. 마주치면 참수당하기라도 할 것처럼.”

“신하 된 자로서 왕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당신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이만 일어나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

“시어도어가 누구야?”

생선가시처럼 걸려 있던 이름을 내었다. 거의 발작적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바스티안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레이첼 같은 측근에게서 캐내었으면 캐내었지, 절대 본인에게는 묻지 않았을 물음이라.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잔뜩 숨을 죽인 채 상대를 응시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시야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누구야?”

“누가 알려주었습니까?”

“누구냐니까.”

그는 놀랍도록 진지해졌다. 저런 심각한 반응이라니. 마음에 걸리기만 한 정도였는데 이젠 반드시 알아내야 할 이름이 되었다.

“누구인지가 대제께 중요합니까?”

“물론이지. 내가 궁금하니까.”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억지 아냐.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그래.”

어떤 의미이기에, 그 몸에 새기고 다닐 정도인지.

“그건.”

“…….”

그녀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게 침묵이 길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깊이였다.

“제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이름입니다.”

“왕이 평생 짊어지고 갈 이름이라. 그게 뭐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설명입니다.”

“더 납득시켜봐.”

“폐하.”

“왜.”

“어째서 저에 대해 알려 드십니까?”

“…….”

“왜, 알려고 하십니까?”

가장 깊숙한 늪 바닥보다도 출렁임이 없다. 바스티안은 속으로 당황했다.

“왜냐니? 그 이유가 중요한가?”

“물론입니다. 제가 궁금하니까.”

“아깐 나보고 억지라며?”

“억지가 아니라고 하신 건 대제십니다.”

“참내, 별 뜻 없어. 나는, 그냥.”

“…….”

“그냥…….”

이번에는 그가 말꼬리를 늘였다. 막상 말하려고 하니 단순한 이유가 아님을 알았다. 속내가 순식간에 파헤쳐진다. 심해 아래서 잔잔히 헤엄치던 심장이 뭍에 나와 헐떡였다.

올곧게 바라보는 그녀 위로 언젠가의 풍경이 겹쳐졌다. 푸른 들판 위 말, 길게 펄럭이는 백사자의 깃발, 그리고 여자. 모든 것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홀로 지고지순한 왕.

그 옆에 서고 싶었다. 그 눈에 담길 세상이 궁금했다.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공평할까. 내가 보는 세상보다 조금쯤은 더 아름다울까.

“어떤 감정으로 저를 보십니까? 혹 여자로 대하고 계십니까?”

“무, 뭐?”

“처음에 대제께선 저를 왕이 아닌 여자로 보셨습니다. 흥미롭게 관찰하시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성적인 관심이었습니까?”

뭐, 뭐뭐뭐. 그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변명, 혹은 항변. 어떠한 감정도 말도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웠다.

“왕과 왕. 외교적인 사이. 조금 더 나아간다면, 선의의 조력자. 도움을 청하러 왔지만, 그 청 또한 거둔 지 오래입니다. 잘리어와 발루아는 서로 우호국일 뿐입니다. 폐하와 저처럼, 그 이상, 이하도 아니지요.”

“도대체, 당최, 무슨.”

“아무리 첫 만남이 공적이었다곤 하나 결국 사람과 사람인지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서로를 알게 되면 감정이 솟는 법입니다. 그것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외려 처음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폐하와 제게는 어울리지 않겠군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행여나 그 감정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일이 없기를 빕니다. 예컨대 중립국으로서의 위치를 포기한다든지 하는.”

“…….”

“저희는 사사로운 관계가 아니니까요.”

속내가 사정없이 꼬집힌다. 그녀는 잔인하고 무섭도록 태연했다. 아, 그러니까 당신은. 바스티안이 시선을 바로잡았다. 그제야 그녀가 세우고 있는 벽이 보였다. 높고 두껍다. 철두철미한 성격을 따라 뿌리마저 깊다. 가슴이 따끔했다. 그 어디쯤 몰래 살아 있던 무언가 살해당한 느낌이었다.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메아리치듯 스스로의 음성이 멀게 느껴졌다. 꼴에 왕이랍시고, 이런 동요에도 흔들림이 없다.

“난 그런 감정으로 당신을 대하고 있지 않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 오해군요.”

“개인적인 자리를 많이 가진 탓이겠지. 앞으로는 좀 자제하도록 하지. 당신 말대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 없고, 곧 떠날 거니까 말이야.”

“그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황금빛 눈이 내리깔린다. 그래서 바스티안 또한 시선을 옮겼다. 술잔 옆에 놓인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 진 손바닥. 전체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불그스름한 칼자국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바스티안의 목으로 날아오던 칼날을 틀어쥐었을 때 입은 상처다. 손가락이 날아가거나 손바닥 전체가 잘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치료 내내 의원이 탄식을 쏟아냈었다.

아직도 그 장면이 선명하다. 눈앞에서 분수처럼 쏟아지던 피, 노한 듯 떨리던 검. 강하게 버텨내던 그 손이, 아, 젠장.

“자리는 이만 파하는 게 좋겠군요.”

“그래.”

“제가 품었던 오해에 대해선 다시 사과를 드립니다.”

“받아들이지.”

“그럼.”

그녀는 깔끔하게 자리를 떠났다. 질척거리는 남자만이 남았다.

그 손이…….

그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묻었다.

평생 저 자신만을 사랑해온 그였다.

그런데 칼을 쥔 손, 아파할 법한데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 모습에, 피를 쏟는 게 차라리 제 목이기를 바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