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잡을 수 있는 행복이라면 잡으렴. 언제까지 네 곁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면 손에 쥐고 놓지 마.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말고, 멍청하게 주지도 말고, 네가 가져.”

어린 나이에 이유도 모른 채 어미, 아비를 잃어야만 했던 윤설은 복수를 다짐한다. 비처럼 쏟아지는 다정에 마음이 짓무를까 두려움을 품지만, 그렇게 무너졌다 굳어져 단단해진 작은 아씨는 붉은 애기동백이 되어 섣달그믐처럼 차갑고 황량한 두 사내의 마음에 내려앉는데…….

“밤의 너는 네가 아니냐?”

“…….”

“네가 장윤설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꼬리도적이라서 싫은 것도 아니야. 그저…….”

안 돼.

이 이상 들으면 안 돼.

윤설은 필사적으로 귀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 손을 들어서, 귀를 막고 듣지 말아야 했다.

“나는 너라서 좋은 거야.”

“…….”

“욕심 많은 나는 어느 쪽의 너도 포기할 수 없구나.”

2. 작가 소개

정연주

최근에 거주 환경이 집필에 최적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 흉흉한 소문과 소문보다 더 빡빡한 막차 시간! 덕분에 외출도 어렵고 해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삼박자 떨어지는 곳이 어디냐면 화성입니다. 화성(星) 말고 경기도 화성.

……위험하지 않냐는 지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골이라 제철채소가 참 맛있다고요(웃음).

▣ 출간작

기화, 왕의 기생들

야수의 청혼

인어의 목소리

캔버스 위의 당신

붉은 매듭

도깨비 각시

가희 사랑할지어다

달빛을 밟는 아씨

어드레스

플러스 플러스 마이너스

미라클 스티치

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공저)

차아제국 열애사(공저)

허니 앤 베어(공저)

하늘 창(공저 단편집)

겨울 엔딩(공저 단편집)

마음을 낚는 이야기꾼 웹소설 작가 되기(공저)

3. 차례

#二十八. 넌지시 움직이는 자들

#二十九. 줄줄이 엮이는 인연

#三十. 파문(波紋)

#三十一. 깨지는 겨울

#三十二. 겁쟁이의 각오

#三十三. 연꽃을 피우기 위해

#三十四. 처녀단자

#三十五. 동백의 주인

#三十六. 밤이 아홉이라도

#三十七. 손에 쥐고 놓지 않을

#三十八. 가시를 걷어내는 여자

#三十九. 솎아낸다고 사라질 거였다면

#四十. 삵

#四十一. 욕심이란 것은 끝도 없이

#四十二. 헌신의 이유

#四十三. 봄비

#外傳 二. 푸른 안대와 운명의 시작

4. 미리 보기

저녁이 깔리고 인정이 지나자 윤설은 옷을 갈아입었다. 암살첩을 챙기고 복면을 단단히 쓴 그녀는 밖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녕.”

“…….”

그리고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만나야만 했던 이가 손을 흔들고 있다. 윤설은 아찔한 기분에 휩싸였다.

찾아간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던가! 입술을 깨물고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들키지 않은 모양이니 얼른 빠져나가야 했다. 윤설은 고갯짓을 하고는 재빠르게 담을 넘었다. 아니, 넘으려고 했다.

“또 도망가는 거야?”

낮과 달리 빈정거리는 말투. 윤설은 담을 채 넘지 못하고 위에 걸터앉은 채 삵을 노려보았다.

말없이 그 서늘한 시선을 받은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담에 훌쩍 올라왔다. 다른 집에 비하여 제법 높은 편인 돌담 위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고 있었다.

“잊어.”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윤설이 입을 열었다.

잊어.

고작 그 한마디. 인정이 될 때까지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감정의 선을 끊고자 하는 그녀의 말에 삵이 고개를 갸웃했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 흐트러진다. 새하얀 탈은 여전히 기괴하게 웃은 채, 그녀를 향해 있었다.

“무엇을?”

“나를.”

“멍청하긴.”

윤설은 울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낮의 강이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상냥한 그와 달리 이토록 깐죽거리는 삵이 동일인물이라니!

윤설이 부글부글 끓는 화를 애써 삭이는데, 그가 불쑥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널 잊으라는 거야. 머리를 돌에 박으면 잊을 수 있으려나? 그게 말대로 쉬우면 너부터 하지그래.”

“장윤설과 멀어지라는 뜻이었어. 낮의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마. 잊고, 모른 척 지내.”

“내가 왜?”

“내 말 들어.”

“싫어.”

말싸움하다 집안사람들에게 다 들킨 판이다. 윤설은 버럭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리부터 옮겨야 했다. 윤설은 너무 가까운 그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도리어 잡혔다. 뭐라고 하려고 하는 순간 삵이 벌인 돌발행동에 윤설은 뻣뻣하게 굳었다.

달칵.

윤설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가 흰 탈을 벗었다.

“……뭐 하는 짓이야.”

달빛 아래, 산발한 머리카락을 한 그의 흰 얼굴이 도드라진다. 흰 탈보다도 더 창백한, 새하얀 얼굴이 산발한 머리카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낮에는 담갈색으로 보였던 한쪽 눈동자는 기이하게도 달빛에 비쳐 노랗게 보였다. 푸르고 노란, 귀신과 짐승의 눈을 동시에 가진 사내가 삐뚜름하게 웃는다.

“멍청한 윤설. 미련한 꼬리.”

“너……!”

강이언의 얼굴로 삵의 빈정거림이라니! 윤설이 이번에야말로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

이게 뭐지? 결 좋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가를 간지럽게 했다. 복면 너머로 느껴지는 숨결에 윤설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정말 네 오라비 말이 딱이야.”

살짝 떨어졌음에도 온기와 숨결이 어지럽게 얽히는 기분이 들었다. 딱딱하게 얼은 윤설을 내려다보며 삵이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장상원의 말을 빌려 아둔하고 미련한 윤설이라면 정말 싫어서 그를 밀어내는 것이 아닐 터다.

욕심낼 수 없어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맞겠지. 그래서 잊으라고 한 것이고.

“얼간이 윤설.”

“당신 정말……!”

“좋아하는 여자를 어떻게 잊으라는 거야.”

숨을 들이켜는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복면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에 배가 부른 기분이 든다.

그녀는 모른다.

욕심이란 본디 끝도 없어서 한번 들기 시작한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